정청래 나이 자녀 가족 프로필 경력 학력 활동 국회의원 정치인
등록일
2024-07-04 09:25:51

정청래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제17대, 19대
, 21대, 2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
965년 5월 18일 (만 60세)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에서
태어났으며, 하동 정씨 본관을 갖고 있다.

그의 가족으로는 부인 김인옥과 세 아들 정한백,
정한결, 정한솔이 있다.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
산동 성산월드타운대림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정청래는 진산국민학교와 진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대
전 보문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입에
실패한 그는 서울에서 재수를 하여 건국대학교 공과대
학 산업공학과에 1985학번으로 입학했다.

이후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에서 북한통일정책
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1989년에는 서울 주한미
국대사 관저 점거 사건을 주도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투옥되었고, 이후 징역 2년
과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복역 후 병역이 면제
되었고, 1991년 출소한 그는 1995년 광복절 특별사
면으로 사면복권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전
환점이 되었다.정청래는 학원 운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 그는 재수 시절 친구인 양태회와 함께 '
길잡이 학원'을 창업했다. 이 학원은 서울 마포구 성
산동에 위치하여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였고
, 빠르게 성장하여 대형 학원이 되었다.

길잡이 학원은 1990년대 초 마포 성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지나친 체벌에 대한 거부감 등으
로 학생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1996년 공동
원장인 양태회와 정청래가 갈라서며 문을 닫게 되었다.

정치 경력으로는 열린우리당 전자정당위원회 위원장
,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초대대표, 건국대학교
민주동문회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등 여러 당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으며, 특히 제19대
국회에서는 대한민국-미국의원외교협의회 회원,
대한민국-이란의원친선협회 이사, 대한민국-네덜란
드의원친선협회 부회장 등을 맡았다.

또한,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며 주요 사건들을
다루었다.

현재 그는 더불어민주당 마포구 을 지역위원장 및 수
석최고위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정청래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인터넷상에서 '싸리비'라는 닉네임으로 글을
많이 써서 꽤 유명해졌다. 그 후 명계남, 문성근
등과 함께 ‘인터넷 정당 정정당당’을 준비하였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지역구 전환이 가능한
정당을 만들기 위해 사무실을 얻고 상근자 30여 명과
함께 준비하였다.

노무현 후보를 돕기 위한 유권자 운동을 펼치며,
‘열심히 욕한 당신, 이제 찍어라’라는 구호를 걸고
‘대학교 내 부재자 투표함 설치운동’으로 전환해 활동했다.


그 즈음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발생하자,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뱃지를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당선된 이후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2월, 정청래는 노무현 지지단체인 '국민의
힘'을 이끌던 당시, 문성근, 이상호 등과 함께 정
동영의 지지세력인 '정사모'와 '국참본부'가 주축
이 된 '개나리 봉사단'에 단체원을 이끌고 들어가면
서 정동영의 휘하로 들어간 것이 실질적인 정계 활동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후 열린우리당 안에서 친노이면서 동시에 정동영
계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친
노의 실질적인 주류가 된 유시민계와 잦은 마찰을 빚게
되면서 친노 안에서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후 2달 뒤인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
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엄청났던
'탄핵 역풍'에 힘입어 44. 8%의 득표율을 얻어

한나라당의 강용석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2005년 열린우리당 내 친노 조직 중 하나
였던 '국민참여연대(국참연)' 조직에 앞장섰다.
정청래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당시 국참연에 공개 2
5명, 비공개 포함 31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국참연은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친노 직계였지만 친
노의 신주류인 유시민계와 점차 관계가 악화되었다.2004년 초선 의원 시절부터 정청래는 같은 당의 유시민
을 공개적으로 여러 차례 비난했다.

정청래는 "노사모 조직에 유시민이 나중에 들어와
플랫폼까지 다 뺏어갔다"고 말하며 깊은 감정의 골을 드러냈다.

그는 유시민이 당내 다른 중진인 정동영, 문희상,
김근태 등 호남계를 맹비난한다는 이유로 비판했다.
실제로 유시민은 같은 당의 정동영을 수차례 비난했
고, 문희상, 김근태도 비난하면서 여러 의원들로부터
당내 분열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청래의 유시민 비판은 점차 강도가 강해져 2007
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는 "유시민
이 당내 대선 주자인 정동영의 당선을 고의로 방해한다
"고 주장하며 유시민을 "간신"이라 지칭하며 그를
출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동시에 "청와대가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고
못하고 있다"면서 '치사빤스',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옹졸한 행위'라고 청와대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이때를 전후로 정청래가 사실상 친노와 결별하였다
고 보는 시각이 있다.동시에 차기 대권주자인 정동영
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 하락으로 결국 열린우리당이
해체되었고, 열린우리당이 해체되기 얼마 전 정청래는
정동영 등과 함께 통합민주당으로 갈아탔다.


이후 대선에서 정동영 캠프에서 홍보위원장 등을 맡
으며 정동영의 당선을 위해 헌신했으나 정동영은 이명
박에게 패해 낙선하고 말았다.

2007년 7월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
고 사립학교법 재개정안과 로스쿨법 직권상정에 반대하
는 의미에서 민주노동당 의원 8명, 무소속 임종인 의
원과 함께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
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한나라
당 강용석 후보에게 밀려 37.9%의 득표로 낙선하였다.4년 뒤 다시 민주당 지지
세가 강력해졌던 2012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후
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누리
당의 김성동 후보와 무소속 강용석 후보를 상대로 54.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의 새로운 당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 선거의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여 당의 정체성을 뚜렷이 하겠다는 슬로건으로
지지층의 호응을 얻어 유승희 의원, 주승용 의원, 전
병헌 의원 등과 함께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종합 득표에서는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은 주
승용 의원에게 밀려 2위를 기록했는데 여론조사 분야에
서는 전체 1위를 기록하였다.

종합 순위 1위 최고위원이었던 주승용
의원이 최고위원직에서 물러나 탈당을 하자, 문재인
지도부에서는 문재인 대표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인물
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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